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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A (life&intrest)/reading

오늘의 거짓말: 평온한 오늘을 위한 현대인의 위선.

<달콤한 나의 도시>를 쓴 작가 정이현의 두번째 단편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
<달콤한 나의 도시>가 무척 좋았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없이 정이현 작가의 이름 하나만 보고 바로 골랐다.
<오늘의 거짓말>은 이 책에 실린 열 개의 단편 중 하나의 제목이지만, 이 책을 대표하는 제목으로도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뒷 표지,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메시지를 짐작케 해주는 저명한 인사들의 글이 실리는 자리에는 소설가  박완서와 오정희의 글이 있다.
 

"여태까지 나는 정이현을 발칙할 정도로 위악적인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특성이 지닌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의 다른면, 따뜻하고 깊이있는 시선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다양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_박완서

 

"정이현은 소통을 열렬히 원하면서도 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이율배반적 모순에 갇힌 모습들을 날렵하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낸다.
 그 가볍고 건조함이 표출하는 블랙유머와 고통의 감춤 혹은 드러냄은 차가운 전율을 불러일으킨다."_오정희

 

사실 소설가 오정희의 작품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가 없고, 박완서의 작품이라면 오래전 읽었던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생각난다.
오래전이라 내용도 잘 기억이 안나지만,(그때는 독서후기같은것도 없이 그냥 읽고 책장덮으면 끝이었던 때라.;;) 꽤 재미나게 읽었던 것 같은데,

근데 저 말은 좀 어렵다. 내공 부족.-_- 

 

단순한 나의 눈높이에서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이 소설집의 단편들은  현대인의 언뜻 평화로운 삶 뒤편에 자리한, 아름답지 못한 진실들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결코 즐겁거나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지만, 딱히 화가나거나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듯, 나역시 바르지 못한 줄 알지만 그럴 수 있을 만한 일, 또는 현실속에서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일들이라서. 분노하는 대신 반성하고 생각했다.
두번째 읽는 정이현 작가의 책은 이런 면이 무척 좋았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점이 우선 좋고, 어떤 이야기든 담담하게, 별일 아닌듯이 이야기하기 때문에 심각하지는 않게,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할거리를 주는 것 같다.
어느 네티즌이 남긴 글처럼 '경쾌하고 빠르게 읽히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다.'는 말이 딱이다.
사람마다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책이 좋더라고.
정이현 작가의 또 다른 작품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도 조만간 읽어봐야 겠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도 그런진 모르겠지만, 난 소설을 보면, 꼭 내 주변과 연관시켜 생각을 하게된다.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시간적 제약이 따르는 특성상, 그 호흡을 따라가느라 생각에 빠질 여유도 별로 없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으니까, 잠시 책장을 멈추고 내 생각으로 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책읽는 속도도 느리고.

이 책에 있는 열 개의 단편들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삼풍백화점'이었다.
'삼풍백화점'의 주인공이 이력서를 열장이나 쓰고도 모자라 또 열장을 쓰기위해 다시 증명사진 인화를  맡기는 것을 볼 때는, 꼬맹이 시절, 삼촌이 들려준 천원짜리 한장을 쥐고 동네 문구점에 이력서 종이를 사러 갔던 때를 떠올렸다.
요즘 이력서는 모두 컴퓨터로 작성을 하지만, 그때는 문구점에 파는 종이 이력서를 썼었는데, 어린 내가 이력서 심부름을 몇번이나 갔던 기억이 있는걸 보면 우리 삼촌도 이력서를 꽤나 많이 쓰셨던 모양이다.

지금 그 삼촌은 좋은 기업에서 일하고 계신다. 내게는 언제나 당당한 기억만 있는 멋진 우리 삼촌. 꼬맹이 시절의 나는 삼촌이 쥐어주는 천원짜리에서 이력서 종이 값을 치르고  남은 돈으로 군것질하는 즐거움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따져보니, 소설속 주인공과 우리 삼촌은 연배가 비슷한 걸로 보건데, 그 당시 삼촌은 내가 사온 이력서 종이에 몇번이나 이력서를 쓰면서 별로 즐겁지 않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주인공이 사고로 잃은 친구 R을 회상하는 것을 보면서는 몇해전 내 곁을 떠난 내친구를 생각했다.
내친구는 사고도 아니었고, 주인공의 친구 R과 하나도 닮지 않았지만, 떠나버린 친구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보면서 그 마음에 심히 동화되어 버렸다.
이 책 바로 전에 읽은 소설이 백영옥의 '스타일'인데, '스타일'에서는 성수대교 붕괴사고에 대한 기억이 등장했었고, 이번엔 삼풍백화점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두가지 붕괴사고는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었다.
1993년 아시아나항공기추락사고와 함께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있을 당시, 나는 한창 예민한 사춘기였고, 이 사고 소식들은 어두침침한 반지하방 작은 텔레비젼으로 희한하게도 항상 혼자 봤었다.
그래서 였을까? 난 세상이 곧 망할거라고 정말로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여러가지로 몹시 힘들었던 저 시기를 함께 해 준 친구들 중 하나가 몇 해전 세상을 떠난 그 친구다.
주인공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로 잃은 친구 R을 회상할때, 내가 내 사랑스러웠던 친구를 떠올린 것은 그때문일지도.

[타인의 고독]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피하려던 일차선의 차가 중앙선 너머 아스팔트 위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가속 페달을 힘껏 눌러 밟았다. 우리는 사고 지점으로부터 점점 빠르게 멀어졌다.
제집 앞에 도착했을 때 주희의 얼굴에 충격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좀 전의 사고에 대해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거꾸로 처박힌 뒤에도 헛돌던 세피아의 낡은 바퀴를, 그녀도 나처럼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공통의 비밀을 공유하게 되었을까.
유능한 공범들끼리의 결말이 대개 그렇듯 이제 주희와 나도 완전 범죄의 기억을 간직하며 각자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일까.
십년 혹은 이십년 뒤, 먼 객지의 선술집에서 왕년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있는 상대의 모습을 목격한다 해도 씩 웃으며 모른 척 해줄 정도의 예의는 간직하리라.
.........................
일상은 그런데로 평온하다.
나는 여전히 세탁소에서 다림질한 흰 와이셔츠를 입고 지하철로 통근한다. 아침마다 무슨 넥타이를 맬까 고민하기는 하지만 손이 가는 건 늘 두어개 뿐이다.
참치김밥을 좋아하는 취향도 변함없지만 야채김밥과 치즈김밥과 쇠고기 김밥을 번갈아 주문하는 습관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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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작고 불완전한 은색 열쇠를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넣어둔채, 십년을 보냈다. 스카치 테이프나 물파스 같은 것을 급히 찾을 때 무심코 나는 그 서랍을 열곤 했다.
R에게서는 한 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R과 나의 삐삐번호는 이미 지상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호출기에서 핸드폰으로, 아이러브스쿨에서 미니홈피로 자주 장난감을 바꾸었다.
..........................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자리는 한동안 공동空洞으로 남아 있었으나, 2004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가 완공되기 몇 해 전에 나는  멀리 이사를 했다.
지금도 가끔 그 앞을 지나간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고향이 꼭, 간절히 그리운 장소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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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

- 응, 부검을 막은게 천만 다행이야. 딴 건 몰라도 부검 결과는 어떻게 손쓰기도 어렵잖아. 걔한테서도 알코올 꽤나 나왔을거야.
  미친새끼. 아침부터 혈중 농도 0.38이 뭐야? 가만있어도 무조건 구속인데.
나는 다급히 그의 입을 막고 싶었다.
-미성년자 건드리는 게 얼마나 복잡한데, 하필이면.......
아무래도 그는 무용담을 함께 나누고 싶은가 보았다.
아무말없이 남편의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른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 그가 자행했을 여러가지 '노력'에 대하여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용서할 수도 있었다. 그가 현우의 아버지이듯 나는 그 아이의 엄마이므로.
남편이 다정하게 잔을 부딪쳐왔다.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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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거짓말]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함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거짓말은 다만 내 밥이지. 밥은 하루에 세번 먹고 거짓말은 하루에 스무번 정도 하니까.
거짓말은 내 밥일 뿐만 아니라 커피이자 담배이며 맥주이고 또한 교통카드인지도 몰라.
나는 하루에 스무번 거짓말을 아여 스타벅스의 아이스 모카를 마시고, 마일드 세븐을 사 피우며,
술집에서 친구들 눈치를 보지 않고 국산 맥주보다 이천원 더 비싼 벨기에산 호가든을 주문하지.
............................
이십육 년이  지났어.
침팬지 인형만 하던 민둥머리 갓난아기는 백육십오 센티미터의 성인 여자가 되어 거짓말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고,
수줍고 발그레한 뺨을 지니고 있던 새댁은 퉁퉁 부은 손가락과 관절염을 가진 김밥 체인점 여사장이 되었지.
주름 한 줄 없이 빳빳한 군복을 자랑하던 육군 대위는 지저분한 추문에 휩싸여 불명예 퇴직을 당하고 이내 세상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졌어.
예측 불가능하고 짐작이 도저히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시간은 참 잔인해.
그리고 시간과 시간의 트새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감당할 수조차 없는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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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리허설]

이 집에 이사 오면서 아내는 온 집 안의 시계를 십 분 앞으로 돌려놓았다.
겨우 십분 먼저 살겠다는 게 대단한 반칙은 아니잖아?
아내가 중얼거렸을때 그는, 그렇지.라고 조그맣게 대꾸했다.
.....................................
그는 의자를 딛고 올라서 시계의 분침을 이십 분 뒤로 돌려놓았다.
십분 먼저 살겠다는 게 반칙이 아니라면, 십분 늦게 사는 것도 페어플레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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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기 전에]

그래, 언제나 딱 여기까지였다.
물고 뜯고 찢고 부수고 피 흘리는 전투는 우리와 거리가 멀었다.
한쪽 눈을 감고 한쪽 귀를 막는 태도가 공동생활에 합당한 지혜라고 믿어왔다.
평화적 거리를 유지하자는 무언의 약속.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격렬한 부부 관계인지도 몰랐다.
.......................................
노인들의 충고는 대체로 옳았다.
지난한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완전한 가정을 이루려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했다.
가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걸 알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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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당신은 파국으로부터 안전한가?_박혜경]

시대의 관습에 의해 이상화된 삶의 이미지를 성취하기 위해 그녀들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관습적 덕목들을 치밀하게 매뉴얼화하는 태도는
남들과 차별화되려는 그녀들의 욕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닮은꼴인 삶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는 치열한 안간힘임을, 정이현의 소설들은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들의 영악한 계산이 봉착하게 될 불길한 결말까지도.
자신이 설치한 계산의 덫에 스스로 걸려드는 이 영악한 헛똑똑이들의 삶을 정이현은 계몽도 냉소도 아닌, 욕망하는 주체 내부의 시선을 통해 들려준다.

 

정이현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악녀라면, 그 악녀들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도덕적 판단의 잣대를 무력화하는 이 시대의 휘황찬란한 욕망의 성채.
닿을 수 없는 거리 저편에서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차갑고 도도한 얼굴로 그녀들을 바라보는 "큐빅처럼 흩뿌려진 서울의 불빛들"(낭만적 사랑과 사회 p35) 이다.
그러니 불빛과 불빛을 향해 모여드는 불나방들 중 어느 쪽이 더 나쁜가?

 

아마도 이 시대 2,30대 여성들의 평균적인 일상과 그 미세한 내면을 이렇듯 정밀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보인 작품은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듯싶다.

작가는 자기 욕망으로 앙앙불락하며 계산하거나 연기하는 영악한 여성들 대신에 중산층적인 안정된 삶의 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세심하고 차분하게 관찰한다.
이처럼 흥분과 냉소를 배제한 세심한 관찰을 쿨하다고만 말해버리기는 다소 미진하다.
쿨하다는 것이 대상이나 사태에 대해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을으로써 스스로에게 도덕적 무책임성을 부과하는 냉소적 태도를 포함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이현의 문장이 보여주는, 대상에 대한 과도한 정서적 대응을 억제하는 지적 세련성이란 차라리 삶이라는 허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더이상 삶의 진실을 믿지 않게 된 자의 언술 태도에 가깝다.

절망과 환멸의 과장된 제스처없이 절망적인 현실의 한 단면을 세밀하게 드러내 보이는 그녀의 문장들은 걷보기에 안정된 중산층의 삶 내부에서 다양한 균열의 조짐들을 읽어낸다.

 

모든 파국의 틈새들을 집어삼키는 평온한 일상에의 욕망은 그토록 집요하고 격렬하다.




책 마지막에 '작가의 말'과 함께 흔하게 실리는 해설.

그 해설이 이렇게 맘에 들기는 처음인듯.

내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들. 그렇지만 내 부족한 글솜씨로는 제대로 표현이 안되는 말들을 어쩜 저리 잘 정리해놨는지.
글 잘 쓰는 사람들,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이 책의 작가 < 정이현 >



오늘의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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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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