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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 A (life&intrest)/reading

소설 [걸프렌즈]: 한남자를 공유하는 세여자의 우정, 가능할까?




출근길 지하철 오갈때에, 시간때우기 용으로 읽을만한 책이 필요했다.
그 용도로  적당히 고른 소설이었다.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들은 몇권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간 실망스러웠던 적이 없어서 별 고민없이 쉽게 골랐다.

대충 넘겨보니, 연애 이야기 인듯 싶었고, 제목이 걸프렌즈이니, 어떤 남자의 여자친구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엮은 이야기겠거니 적당히 짐작하였다.

음,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한 짐작이었던지라 별로 맞은게 없다.

가볍게 읽히긴 했다. 애초 마음먹기론 시간날때마다 틈틈히, 이번주엔 이책을 읽어야지 했었는데, 사흘만에 다 읽어버렸으니까.

연애이야기가 맞긴 하지만 날아갈듯 밝은 연애이야긴 아니고, 그렇다고 눈물짓는 슬픈 연애는 더더욱 아니고.

내가 딱 좋아하는 적당한 무게감을 가진 이야기였다.

 

이 소설,  줄거리만 요약해 말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 되어버린다.

애초의 대충 짐작이었던, "어떤 남자의 여자친구들 이야기"라는 말로 써도 틀리진 않지만, 부가설명이 필요하다.

"어떤 남자의(동시에 만나는 세명의) 여자친구들 이야기"가 맞겠다.

여기서 중요한것. 이 소설의 주요한 인물은 세여인과 연애중인 '남자'가 아니라 '세명의 여자친구들'이란 거.

좀 더 명확히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 한 남자를 공유하는 세 여자들의 미묘한 우정이야기"쯤 되겠다.

딱,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이 소설, 뭔가 상당히 파격적이고 발칙한 이야기일것 같은 생각이 들어버린다.

'뭐? 남자를 공유해?'

'근데, 그 여자들이 심지어 '우정'이라굽쇼?'

책의 소개글에도 이 소설을 " 경쾌한 터치로 21세기의 새로운 연애방식을 재기발랄하고도 능청스럽게 형상화한 도발적이고도 발칙한 러브스토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 소설은 별로 발칙한 느낌은 아니다.

파격적이라기보단 꽤나 일살적인 이야기들을 한다.

내 남자친구(일까?)가 바람(일까?)을 핀 여자들과 친해졌다는 점, 이거 하나만 뺀다면 말이다.

 

소설의 화자인 한송이는 스물아홉 직장인이다.

최근 서른즈음, 그 근처의 여인들이 주인공인 소설이며 드라마, 숱하게 봤지만 동갑내기는 또 더 반갑네.

게다가 한송이는 말이지. 워낙에 비슷한 또래의 소설속 주인공에는 동질감을 느끼기 쉽다고 하더라도, 다른 소설 속의 그녀들보다 특히 더 나랑 잘 맞는다. 소설속에 드러나는 성격적인 부분이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외향적인 부분이나.

스물아홉 동갑내기에 얼추 비슷한 가정환경, 그저그런 직장인의 위치, 그냥저냥한 연애경험치,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외모적인 이미지, 무난한듯 무난하다고만 말할수는 없는 성격같은 것들말이다.  

만약, 같은 학교를 다녔고, 집에 가는 길이 같은 방향이었다면 꼭 친해졌을법한 그런아이.

 

그런 그녀에게 일어나는 직장에서의 퇴직, 남자친구의 바람, 아버지의 교통사고, 친한친구의 연애사건에 휘말리기, 이혼한 부모의 새로운 연애, 철없는 언니의 내속긁기, 등등의  에피소드들은 내게도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난 적도 있는, 일상적인 사건들이다.

그래서인지 파격적일게 없다.는 느낌.

그런데 우습게도 조금만 달리 말하면, 아까마냥 굉장히 발칙하고 파격적인 이야기인양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내게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황당한 사건, 굉장한 사건, 파격적인 사건도 실은 그다지 황당하고 굉장하고 파격적일게 없을지도 모른다고.

응,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세상에 그다지 놀랄일도 절망스러울일도 없을것 같아.

 

책의 뒷 표지에는 '오늘의 작가상'수상작들이 모두 그렇듯이 심사평의 일부가 발췌되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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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사평 중에서 >

2007년 제 31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경쾌한 터치로 21세기의 새로운 연애 방식을 재기 발랄하고도 능청스럽게 형상화한 도발적이고도 발칙한 러브 스토리.-

 

#이 소설에서 연애는 메두사의 머리처럼 머리가 여러 개다. 연애 속에 또 다른 연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가지 점에서 새롭다. 첫째, 양다리 혹은 세다리 걸치기가 인간의 '악함'이 아닌 '약함'에 연유한다는 점. 둘째, 여성의 연애 심리에 대해 남성들보다 여성들 자신이 더 궁금해한다는 점. 그리고 셋째, 21세기는 연애의 '획득'보다 획득된(듯한) 연애의 '유지'가 더 힘든 시대라는 점 등이다. 이런 연애를 문제 삼을 때 인간에 대한 이해는 복잡해지고, 자아는 겸손해지며, 세상은 살아있게 된다. 이 소설은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르지 않게 찾아온 바로 '오늘'의 소설이다! _ 김미현(문학평론가/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최근 한국 소설은 변화하고 있으며 소통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걸프렌즈]는 이번 심사에서 느낀 모든 것들을 다 담아 낸 듯한 소설이다. _ 김연수(소설가)

 

#한 남자를 사람하는 세 명의 여자가 질투와 우정을 동시에 품고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이 소설은 그 주장을 유연하고도 능청스럽게 형상화한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은 것은 이 시대의 독자들과 이 작품의 도발적이고도 끈끈한 매혹을 같이 맛보고 싶어서다. _ 정미경(소설가)

 

#한국의 동시대적인 문화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무리 없이 잘 쓰인 작품. 넘쳐나는 문화적 이미지만 남은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공간이 잘 드러나 있다. _ 허윤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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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 김미현"님의 심사평이 인상적이다.

"양다리 혹은 세다리 걸치기가 인간의 '악함'이 아닌'약함'에 연유한다는 점"-

이 부분에서 문득,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세여자가 공유하고 있는 연애의 대상인 그남자- '유진호'의 외모를 생각해봤다.

재미있게도 이책을 모두 읽고도 이 남자, 유진호의 외모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무엇이든 무의식중에 '이미지화'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특히 소설을 읽을 때면 주요 등장인물들의 외모를  꼭 상상해 보게 된다.

이 소설의 경우, 세 여자, 송이/보라/진의 외모는 물론 송이의 언니, 아빠, 엄마, 심지어 잠깐 나오는 송이의 사무실 옆자리그녀, 수경씨 얼굴마저도 상상이 잘 되는데, 이남자'유진호'만은 외모설정이 잘 안된다.

어째서일까.

내용상 매우 중요한 인물일 수 밖에 없는 그에 대한 묘사가 책속에 부족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건데, 아마도 이남자에 대한 내 마음속 평각가 자꾸 왔다갔다 바뀌고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왜, 이사람이 마음에 들면 그가 어지간히 사나운 이목구비가 아닌다음에야 선한인상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사람이 싫으면 아무리 예뻐도 그사람 무지 여우같이 얄밎게 생겼어- 생각하게 되듯,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사람의 외모에 대한 느낌도 결정짓게 되지 않는가.

헌데 내게 유진호는 나쁜놈인것도 같았다가, 불쌍한 사람인 것도 같았다가, 다정하고 착한 사람인것도 같고..............헷갈린단 말이다.

해서 이남자의 외모에 대한 이미지는 도무지 명확해지지가 않았던 것 같다.

처음, 송이와 키스하고 카섹스를 즐기며 연애 초기 모습을 보여줄 때에는 세련된  도시 직장인 남성의 모습이었다가 소설 중반즈음, 여자들에게 시간차로 전화를 걸어 말을 둘러댈 때에는 찌질한 30대평범한 남자의 모습이기도 했다가, 소설 말미즈음 송이가 마음속으로 어쩌면 이 관계의 가장 외로운 피해자는 이남자'유진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대목에서는 또 심히 공감이 되면서.....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지금도 그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왔다갔다....."도무지 어떤놈인지 모르겠다."이지만, 심사평의 말처럼, 소위'나쁜짓'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 '나쁜 사람'이기보다는 '약한사람'이어서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유진호'를 통해 할 수 있다.

어떤 결핍에 의한 나약함. 그 약한 마음이 나쁜짓을 하게 하는 것이지. '나쁜짓'이라고 모두 '악한마음'에서만 오는 것은 아닌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이해를 한다고 해도 말이지.

이런게 남자라면, 연애가 이렇게 복잡한 거라면,

아, 내겐 정말 어렵다. 너무 어려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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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 생기면 가 보고 싶은 데 있어요?

남산타워요.

왜요?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냐고? 말문이 막혔다. 그의 등 뒤에 보이는 남산 타워를 보고 즉흥적으로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딱히 이유가 없었다.

남산타워에 가 보지 못했거든요. 내 마음을 모두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 가보려고 아껴 뒀어요.

이유야 만들기 나름. 삶의 이유들은, 거짓말을 내뱉은 후에야 더 명확해지곤 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거짓말은 날개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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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안 준비로 점심시간이 따로 없다. 타 금융회사에서 만든 상품 자료를 뽑아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벼락치기와 짜집기. 언제부터 벼락치기와 짜집기로 근근히 버티는 인생이 되었더라?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나는 초저녁에 방영하는 만화를 다 보고 눈에 잠기운이 꾸역꾸역 차야 숙제로 내준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설렁설렁 출석만 하다가 시험 날짜가 임박해야 새벽까지 머리 싸매고 공부를 했다.

만화주인공 밍키가 그려진 짝꿍의 필통의 보고는 문방구에 가서 슬쩍 비슷한 걸 샀고, 묘한 죄책감에 연필이나 지우개 따위만 전혀 다른 것들로 꽉 채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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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지하도 계단을 오르면서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한 두어번쯤 한다. 구두를 벗어 전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다가 지하도 출구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을 본다. 이를테면 주택청약부금, 달마다 나오는 카드 대금, 날마다 쓰는 교통비, 그리고 소정의 유흥비 따위를 떠올리면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일보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진다.

점심시간, 4000원에서 6000원 사이의 따끈따끈하고 얼큰한 찌개를 포기한다. 편의점에서 1200원 주고 산 샌드위치 하나로 꿋꿋이 버텨야만 하는 이유는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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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바뀌면 어떡해?

-무슨 마음?

-언니 마음이 변하면 어떡할 거냐고.

-왜 변해?

-사람 마음이야, 변할 수 있는 거잖아. 언니의 감정이 다 식어 버릴 수도 있는 거고.

-왜 식어?

언니는 마치 첫사랑을 만나, 구구절절한 이야기와 고비를 거친 끝에 결혼에 골인하는 사람처럼 내 의중을 모르는 척한다. 1년이 멀다 하고 남자 친구를 갈아 치워 왔으면서 말이다.

-요즘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 있니? 결혼은, 확신이야.

언니가 이렇게 말하면서 리모컨로 텔레비전을 끈다. 무슨확신? 그 남자가 변호사여서 드는 확신? 다른 건 몰라도 호의호식하고 살 거라는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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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른넷, 차차 결혼을 준비할 나이.

이목구비가 반듯하긴 하나 특색 없이 밋밋한 얼굴이다. 키도 큰 편이 아니다. 그런 얼굴을 더 평범하게 만드는 안경까지 끼고 있다. 이력도 그의 외모처럼 반듯하지만 뭔가 특색이 없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왔고, 지금은 중견 기업의 대리다. 서른넷에 대리면, 그리 빨리 승진을 한 것도 아니고 아주 떨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평범함에는 진중한 매력이 있다. 내가 남자를 한두번 만나 본 것도 아닌데 모를가. 조금이라도 잘났다 싶은 남자들! 자신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 연인이면서도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힘겨울 때가 많다. 그 잘난체, 맞추느라 진을 빼야 한다.

그에게 가장 점수를 주고 싶은 건 단연 성격이다. 뭐 대단한건 아니다. 대다수의 남자들처럼 권위저깅거나 가부장적인 가치관이 없을 뿐이다.

나는 얼굴만 보는 10대가 아니다. 능력만 보는 20대도 어물쩍 보냈다. 얼굴과 이력이 보통인데 성격이 좋다면, 과감히 연애를 해 볼 수 있는 스물아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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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걸쭉한 침에 섞어 삼킨다.

스물아홉 연애에는 나름대로의 금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연애가 결혼을 전제한 것이든 아니든 결정적인 순간까지 지켜야할 필수적인 사안이다.

이를테면 첫째, 가족 얘기는 삼가도록 한다.(예전에는 남자 친구 가족들과 밥을 먹기도 했다. 헤어지고 나서는 남자 친구보다 가족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기가 더 어려웠다.)

둘째, 싸이월드에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지 않는다. (예전에는 싸이월드에 남자친구와 찍은 사진을 주야장천 올렸다. 헤어지고 나서는 그 사진들을 정리하느라 밤을 꼴딱 새우다가 종내에는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

셋째, 과분한 선물은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무리를 해서라도, 카드 할부로라도 정말 어울릴 법한 멋진 선물을 사 줬다. 헤어지고 나서 나머지 할부 금액이 청구될 때마다 헤어진 남자 친구에 대한 증오심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넷째,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다.(예전에는 묘연한 통화 내용을 들으면 바로바로 추궁했다. 헤어지고 나서는 그런 나 자신이 무첫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만약에 상대의 행동이 미심쩍거든 비슷한 행동을 하면 그만이다.)

.............................

경미한 상처들이 켜켜이 쌓였다. 거쳐 온 모든 이별들이 나를 점점 쪼그라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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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 내게 닥친 일들이 장기 연체된 비디오처럼 무겁고 짐스러웠다. 이 상황을 몰래 수거함 같은 곳에 쑥 밀어 넣고 서둘러 발길을 돌리고 싶었다. 발길을 돌린 비디오 가게 앞은 인적 없는 밤이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내 얼굴에 드리워진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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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주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벌써 두달째. 나보다 먼저 그만둔 상태다. 하지만 나와는 경우가 다르다. 나는 생선 토막 나듯 잘린 거고 현주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자진해서 나온 거다.

-스물아홉은, 유턴하기에 딱 좋은 나이인 거 같아.

현주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말한다.

-쳇

내가 비웃는다.

-생각해봐. 열아홉 때는 의지는 왕성한데 무언가 판단할 능력이 떨어지잖아. 그리고 서른아홉은 판단할 능력은 있는데 의지는 현저하게 빈약해지지. 그런데 스물아홉은 의지도 있고, 판단 능력도 있잖아?

-휴, 난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까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갈지 모르겠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무언가 바닥을 치는 고통은 아닌데, 정말 무얼 하며 먹고산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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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테이블 위에 케이크 상자를 받쳐 치즈 케이크를 올린다. 그리고 딱 내 나이만큼의 촛불을 꽂는다. 더도 덜도 아닌 큰 초 두개와 작은 초 아홉개.

-한 살만 더 먹었어도 초 꽂기가 더 편했을 텐데. 

진이 농을 치며 씩 웃어 보인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진다.

며칠 후면, 서른이다. 생일이 12월 말이다 보니, 스물아홉 에서 서른이 되는 시간은 너무 기습적이다. 언제부턴가 한설을 더 먹는 일은 내게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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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와인잔을 들자 보라와 나도 따라서 와인잔을 든다.

-우리, 한 남자를 사랑하는 세 여자의 동호회를 위하여!

진이 발랄하게 말한다. 그 발랄한 어감이 내 등줄기를 서늘하게 한다.

-음.... 걸프렌즈 클럽! 어때?

진이 고개를 갸웃한다. 보라가 와인은 마시지도 않은 채 잔을 내려놓는다.

클럽이라니? 세상에 없는 클럽이 없다는데, 그래도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클럽은 처음 들어 봤다. 연예인이나 공인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게다가 그는 그토록 매력적인 장동건도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클럽 이름이 '걸프렌즈'라니! 이 단어에 붙은 복수형의 S자가 이렇게 잔인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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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고 선한 얼굴. 나는 그런 말을 자주 들어왔다. 예쁘진 않지만 반듯하고 선한 얼굴. 그럭저럭 삶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일테면 면접을 봐야 할 때나 친구들이 나를 팔아야 할때. 그 누구도 내가 도를 넘는 행동을 할 거라고 예상치 못한다. 하지만 내 얼굴은 외관만 단정할 뿐 속은 음탕한 꿍꿍이로 가득 찬 삼류 모텔이다.

외관이 그러하니 나에게 속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일찍이 처녀를 뗐는데도 스물 세살때 만났던 남자는 내가 처녀인 줄 저 혼자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 나한테 말짱 속았다고 떠들고 다녔다. 이후, 뒤로 호박씨 깐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쳇, 누가 처녀라고 말했냐고!

나는 지금껏 오럴을 해 보지 못했다. 이나이에 오럴 한번 못 해 봤다면 자랑은 아니다. 현주의 말을 빌리면 그 또한 내 얼굴 때문이란다. 내 얼굴을 보면 그런 걸 절대 안 하게 생겼다나? 그러니 반듯하고 선한 얼굴이 꼭 도움만 주는 건 아니다.나는 어떤 건지 정말 궁금했는데 그 누구도 내게 그런 걸 시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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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두려워졌다. 그녀들과의 관계,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해 그를 포함한 우리 넷의 관계가 문득 위험하게 느껴졌다.

내 연인의 또 다른 연인들과 만나서 가까워지다 보니 그다지 이상할 건 없었다. 처음엔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그녀들을 만나자 무언가 생경하고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색다른 경험이 나쁘지 않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집착인지 모르겠지만, 그에 대한 감정도 이상하리만치 풍만하게 지속됐다. 그녀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내 후미진 내부를 충분히 나누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아무와도 나눌 수 없는 결핍을 그녀들과 나눌 수 있었다.

선의와 악의를 넘어 그가 그 누구와도 관계를 끊지 못했으니 차라리 이런 관계가 더 속 편했다.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어, 마음 졸이며 지내는 것보다 나았다. 물론 이따금씩 묘한 경쟁심에 유치한 행동이나 말도 서슴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괜한 뿔따구를 냈지만, 잠시뿐이었다. 애초에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증오심 따위는 이 관계가 숙성할수록 가라앉았다. 그리고 오래 숙성시킨 와인처럼 그 맛에 중독되고 취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갑자기, 그와 보라를 축하하러 가자는 진의 말에 뜨악한다. 연인 사이가 특별한 건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둘만의 교감, 소통, 비밀 같은 것들이 그 관계를 감싸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을 다 까발려 타인에게 노출해야 한다? 온몸의 근육이 단단히 경직되어 움직여지지 않는다.

왜일까. 지금 그녀들과의 관계 때문에 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 이상한 폭력의 희생자가 그녀들이나 내가 아닌 그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일렁인다.그가 이 사실을 알면? 더럭 겁부터 먹을 것이다. 당혹스러운 나머지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확,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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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트렁크를 볼때마다 마음이 저몄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 함께 오는 슬픔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이 나이가 되어 겨우 알게 된 거라곤 슬픔과 기쁨은 한 몸, 완전한 기쁨도 완전한 슬픔도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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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다들 진호에게 얘기하지 않았던 거야?

...

-그럼, 언니는 왜 말하지 않은 건데요?

-난 진호를 완전히 갖고 싶은 마음과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항상 교차했어. 그러다 보니까 진호에게 전부를 강요할 수 없었지.

-서로 다른 욕망의 충돌이죠.

보라가 진의 말을 단번에 정리해 버린다. 보라는 무슨 얘기를 듣든 요점을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전요. 비슷하긴 한데....진호 오빠에게 가족 이상의 신뢰가 가고, 오빠가 좋긴 한데요, 이런 사람, 만나기 힘들 거라는 거 아는데요. 평생 이 관계가 유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것 또한 전부를 걸지 않아서지.

진이 보라에게 일침을 가한다.

-휴게소요.

보라가 담담하게 대꾸한다.

-휴게소? 진호가 휴게소란 얘긴가?

-네

-그건 너무 안됐잖아.

진이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장거리 여행을 하는데 휴게소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사실, 여행 목적지보다 가는길에 만나는 휴게소가 더 신나고 좋았어요. 어쩌면 그 여행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휴게소에서 보내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나 또한 그를 나의 완전한 반려자가 아닌 휴게소쯤으로 생각해 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자신이 안고 있는 것 중 어느 하나도 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불안감. 그는 그렇게 아득한 내면 저 아래서부터 끊임없이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빠가 누구에게나 그런 상대이길 바라진 않아요. 그곳이 좋아서 정말 정착하게 될 사람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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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다. 승진을 하면 결혼하는게 더 수월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됐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한 번에 두 가지씩 좋은 일이 생기는 건 곤란하다고.

 

나에게 이 '걸프렌즈'가 그의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에 대한 비슷한 취향을 공유한 나의 여자 친구들로 다가온 것은 왜일까? 이제 그녀들과는 한 남자를 고유한 지하 단체의 비밀결사에서 동업자 관계가 되어버렸다.

그와 헤어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새벽을 거치면 소란스럽게 북적대는 아침이 오듯 우리들에게도 가혹한 현실은 들이닥칠 것이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련다. 그냥 지금이 나쁘지 않을 뿐이다.

 

새록새록 느껴지는 이 새로운 감정들이 나를 또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나를 살게 해 준다.

그래, 아직 서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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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었는데, 이 소설 영화화도 됐었구나....
난 꼭 소설 다 읽고, 감상글도 다 쓰고 나면 이런걸 알더라...-_-;;



















걸프렌즈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이홍 (민음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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